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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월 15일 주일 복음: 요한복음 1:8-XNUMX

부활절 V주일 B

"1 나는 참포도나무이고 내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2 내 안에서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모두 그분께서 잘라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려고 가지치기를 하십니다. 3 내가 너희에게 선포한 말로 너희는 이미 정결하였느니라. 4 내 안에 거하고 나도 너희 안에 거하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이다.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6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는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느니라. 그런 다음 그를 모아다가 불에 던져 태워버립니다. 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것을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8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고 내 제자가 되면 이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요 15 : 1-8

친애하는 Misericordie의 자매 형제 여러분, 저는 Carlo Miglietta, 의사, 성서학자, 평신도, 남편, 아버지, 할아버지입니다(www.buonabibbiaatutti.it). 또한 오늘 저는 복음에 대한 짧은 묵상을 여러분과 나누겠습니다. 자비.

오늘 복음(요한 15-1)은 비유와 우화로 구성된 유대 문학 장르인 마샬인데, 양문과 목자의 이미지(요한 8-10)에서 우리가 이미 접한 바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참 포도나무”라고 소개하십니다. 이 이미지에 대한 몇 가지 참조가 있습니다.

(a) 구약의 참고 문헌:
– 집합적 상징: 때때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가리키며,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속함을 강조함(사 5:1-7; 27:6-2; 호 10:1; 렘 2:21; 겔 19:10-14). 그러한 상징주의는 공관복음에서 종종 채택됩니다(막 12:1,11; 마 20:1-16; 21:28-32…).

– 개별 상징: 종종 모든 배고픔과 목마름을 채워줄 종말론적 포도나무인 메시아(아가 80:15-16; 집회 24:17-21)를 가리킨다. 창세기(창 1:9), 그 열매는 사람을 “하나님과 같이 되게” 합니다(창 3:5).

(b) 성찬 관련 언급: 요한복음에는 성찬례 제정에 대한 설명이 빠져 있지만, 요한복음 6장 51절의 “나는 살아 있는 빵이다”와 요한복음 15장 1절의 “나는 참 포도나무다”는 이중 제화를 형성합니다. 공관복음의 “이것은 내 몸이니라”, “이것은 내 피니라”와 유사하다. 반면 막 14장 25절과 마 26장 29절에서는 잔이 “포도나무 열매”라고 되어 있다.

c) 예수님과의 연합: “예수님은 종말론적 포도나무이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메시야이시고, 이스라엘의 남은 자이시며, 모세의 율법을 대신하시고 내부로부터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에게 활력을 불어넣는 말씀-지혜이시기 때문입니다”(파니몰레). 예수님은 메마른 회당과 유대교에 반대할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생명을 약속하는 모든 이데올로기(국가, 종교, 권력, 경제, 물질주의, 소비주의, 쾌락주의…)에 반대하는 “참” 포도나무이십니다. 예수님과 연합해야만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떠나면 죽음만이 있을 뿐입니다. 신자들의 삶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강도에 달려 있습니다. 다른 어떤 방법도 인간에게 “참된” 존재를 제공하지 않습니다(요한복음 15:1).

오직 예수님 안에서만 우리는 “열매”를 맺습니다(요한 15:5). 이 문구는 인간이 신의 도움 없이도 자연적인 의지의 힘으로 선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한 펠라기우스에게 사용되었습니다. 아담은 나쁜 일을 세웠을 뿐입니다. 예: 그리고 펠라기우스는 제529차 오렌지 공의회(1546)의 정의로 답했습니다. 펠라기우스와 대조적으로 개신교 종교개혁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악하며 인간의 자유는 기원의 죄에 의해 무효화되었다고 단언했습니다. 은혜의 가치와 인간이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가능성.

우리는 “그 안에 거”해야 합니다(“menein ein”은 4-10절에서 2.5.8번 반복됩니다!). 그러나 신앙의 제안은 다시 한 번 그 어느 때보다 구체적입니다. 우리는 형식적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요구받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적 동의나 정통 신앙 고백을 요구받지 않습니다. 심지어 제의적이거나 전례적인 차원도 아닙니다. 우리는 “열매를 맺고”(8절),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7절)하고, 기도가 효력을 발휘하도록(1절) 정통 실천을 요구받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우리의 삶을 변화시켜 그분의 생명의 피, 곧 아가픽 수액(요일 4:8)을 세상에 가져와야 합니다. 즉, 보답을 기다리지 않는 사랑, 즉 순수한 희생과 봉사입니다. 우리가 “진리 안에 있나니…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아니하고 오직 행함으로…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켜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면…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그의 계명은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니라”(요일 1:3-18). 믿고 사랑하는 것: 믿음과 사랑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정의합니다. “사람이 행위에 관계없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습니다”(로마서 24:3). 그러나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보서 28:2).

신앙은 세례성사를 통해 단번에 깨달은 정적인 상황이 아니라 오히려 역동적인 현실입니다. 우리는 아버지께 “잘림을 받고 가지치기를” 받아야 합니다(2절: “airein”과 “kathairein”). ,” 3절의 “카타로스”, “세상”, “순결한”을 연상시키는 비슷한 소리의 동사 두 개). “좌우에 날선 검보다 예리한”(히브리서 3:13) 주님의 말씀(4절)은 우리를 지속적으로 정결하게 하고, 우리를 더욱 훌륭하고 신실하게 만들도록 끊임없이 도전합니다. 더 가난하고, 더 사랑과 봉사를 할 수 있고, 더 진실되고, 더 복음적이고, 더 기독교적입니다. 신자는 고통을 면치 못하지만 고난 속에서 새 사람이 태어납니다(요 16:21). 이 구절에는 예수님과 연합하여 신자가 성장하고 성숙하는 힘든 과정뿐만 아니라 때때로 신자에게 닥치는 악의 신비도 가려져 있습니다. 이 신비는 하나님 보시기에 교육적이고 정화적인 가치를 가질 수 있습니다.

오직 아버지만이 포도원지기이심을 주목하십시오. 그분은 포도원의 유일한 주인이시며, 누구도 가지를 제거하거나 가지치기하는 권한을 자신에게 맡길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항상 우리가 포도원에 대한 심판과 큰 자비를 피하는 태도를 취하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우리 형제자매들.
“믿고 사랑하라는 '계명'은 추상적인 부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와 행위에 위치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체험될 수 있고, 그분이 '취하신' 사람들 안에서 구체적입니다.”(E. Jerg) . 진정으로 주님을 만난 사람, 그분을 삶과 죽음의 유일한 의미로 발견한 사람, “그 안에 거하는” 사람은 복음과 형제자매를 위해 자신의 온 삶을 바칠 줄 압니다. 실제로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요한복음 12:25).

이것은 가혹하고 거의 마조히즘적으로 들리지만 오히려 행복을 위한 방법입니다.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한복음 3:10)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온전한 기쁨을 주실 뿐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은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우리가 생명을 가질 수 있고 그분을 떠나면(요한복음 15장 5절의 헬라어 “코리스”는 “밖”과 “멀리”를 뜻함) 우리가 부정과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것을 상기시켜줌으로써 결론을 내립니다. 우리는 “버려져 마르는 가지”와 같으나 “불에 타버릴” 뿐(요 15:6) 유용합니다.

모두에게 행복한 자비를 베푸세요!

본문에 대한 보다 완전한 주석이나 통찰을 읽고 싶은 사람은 다음 주소로 저에게 문의하십시오. migliettacarlo@gmail.com.

출처

Spazio Spado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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