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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월 15일 주일 복음: 요한복음 9:17-XNUMX

VI 부활절 B주일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내 사랑 안에 거하라. 10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면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키고 그분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처럼 너희도 내 사랑 안에 거하게 될 것이다. 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12 내 계명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14 내가 명령하는 대로 행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이다. 15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모두 너희에게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고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17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요 15 : 9-17

친애하는 Misericordie의 자매 형제 여러분, 저는 Carlo Miglietta, 의사, 성서학자, 평신도, 남편, 아버지, 할아버지입니다(www.buonabibbiaatutti.it). 또한 오늘 저는 복음에 대한 짧은 묵상을 여러분과 나누겠습니다. 자비.

서로

“Allèlous”, “서로”는 신약 성경 전반에 걸쳐 강력하게 반복되는 단어입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할 뿐만 아니라(요한 13:34; 15:12; 로마 12:10; 살전 1:4) ; 요일 9:1; 3:11,23. 4-7; 요이서 11:12; 베드로전서 2:1) 그러나 우리는 “서로 발을 씻어야” 합니다(요한 5:1). 서로 존중하라”(롬 1:22), “서로 판단하기를 그치라”(롬 13:14),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환영하신 것처럼 서로 환영하라”(로마서 12),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롬 10:14), “서로 기대”(고전 13:15), “서로 거짓말을 하지 아니함”(골 7:16), “서로 덕을 세우며”(살전 16:1) … 교회는 상호관계의 장소, “서로” 형제애의 긴밀한 관계를 맺는 장소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syn”, “with”, 나눔, 교제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바울은 농담하고, 참으며, 동역하고, 동거하고, 동역하고, 심지어 신조어를 창안하는 것에 대해서도 말합니다. (고전 1:12; 고후 26:2; 빌 7:3; 1:27). 그리스도인들은 형제자매들을 “불쌍히 여겨”, 즉 그들과 함께 “고통”하는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과 함께 울십시오”(로마 2). 모욕과 환난을 당하는 자들을 동정하라”(히 17:12); “(그리스도 신비체의)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습니다.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그와 함께 기뻐하느니라”(고전 15:10). 함께 기뻐하고 우는 것은 서로를 위해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타인은 나이고 나는 타인이므로 나는 타인의 삶을 살게 될 정도까지 밀어붙이는 극기입니다(빌 33:1-12). 26:2;

“신약성서 전체는 “syn”(함께)과 “allèlon”(상호적으로)으로 표시된 “forma vitae”를 배우는 것으로서의 친교에 대한 관심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상호주의로 표시된 행동에 대한 책임을 향해 함께 행동합니다. 그것은 일상적 관계의 가장 기본적인 구조에서 태어나 개인주의에서 벗어나 계속해서 나눔에 안착하는 운동의 형태를 취하는 여정입니다. 이 모든 것의 '텔로스'는 바울이 고후 2:7에서 잘 표현했습니다. '함께 죽고 함께 사는 것'” (E. Bianchi).

사랑의 교회

베네딕토 13세는 교회가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썼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교회성의 유일한 기준은 형제애입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한복음 35:XNUMX). XNUMX세기 이교도들은 터툴리안이 “그들이 어떻게 서로 사랑하는지 보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 생활의 가장 중요한 차원은 형제 사랑입니다. “형제 우애로 서로 사랑하고, 서로 존경하기를 힘쓰십시오”(로마서 12:10). 우리가 교회에서 추구해야 할 것은 어떤 일이 있어도 시기하지 않고, 가식 없이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우애와 상호 수용, 판단을 삼가는 곳, 참되고 온전한 형제애가 있는 곳이 되도록 하십시오.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교회는 “서로” 형제적 관계가 매우 긴밀하고, 실제로 한 몸을 이룰 만큼 “함께”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동시에 우리는 사랑을 뿌리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점점 더 “자비의 교회, 다른 사람의 고통에 참여하는 교회, 하나님을 향한 열정의 표현으로 참여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에 관한 성경적 메시지의 핵심은 고통에 민감한 메시지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에 민감하고 궁극적으로 원수의 고통에 이르기까지… 고통의 문제를 상대화했다. 기독교는 주로 고통에 민감한 종교에서 주로 죄에 관심을 갖는 종교로 바뀌었습니다. 교회는 항상 무죄한 희생자들보다 죄인들을 더 가볍게 대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첫 눈길은 다른 사람들의 죄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있었습니다. 그 자체로 경직된 부르주아 종교의 언어로, 그 어떤 것 앞에서도 자신의 난파에 직면한 것만큼 두려워하지 않고 따라서 내일 닭보다 오늘 달걀을 계속 선호하는 부르주아 종교의 언어로 이것은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그 대신, 우리는 지속적인 동정의 길을 떠나야 하며, 타인의 고통을 회피하지 않겠다는 용감한 준비, 세련된 무관심과 교양된 무관심이라는 현재의 흐름을 피하는 연민의 동맹과 프로젝트 기반에 헌신해야 합니다. 행복과 사랑은 자기애적 장치의 제정으로서만 경험하고 축하합니다.”(JB Metz)

형제애, 교회론의 유일한 기준

그러면 형제에 대한 사랑은 참으로 예수님 제자들의 표징이 되며,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과 그를 녹이는 사람들, 빛의 자녀들과 어둠의 자녀들 사이를 식별하는 기준이 됩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한복음 13:34-35). “서로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요일 1:4)는 것을 확신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요한의 편지는 모든 시대의 교회가 그 본질, 즉 아가페의 자리, 사랑의 자리, 다름 아닌 “아가페”(요일 1:4)이신 하느님 현존의 표징으로 돌아갈 것을 강력히 촉구합니다. 사랑. 요한은 교회가 이념이나 권력이 되지 말고, 모든 문화에서 모든 사람과 함께 서서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그들의 가난과 고통을 받아들이고 하느님의 은총의 구체적 표징을 그들에게 전할 것을 촉구합니다. 사랑.

요한 서신은 교회가 그리스도처럼 자신을 비우고, 자신을 벗어버리고, “케노시스”(필리 2-7)의 신비를 실천하여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이 되시도록 권면합니다(8코린 1). 9). 정의에 대한 헌신과 봉사 속에 살고, 모든 사람,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고통받는 사람, 소외된 사람, 소외된 사람 안에서 사랑할 하나님을 보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강하고 때로는 고통스럽게 하느님 사랑의 신비를 고백하는 전투적인 교회입니다.

확실히 요한의 관점은 공관복음의 관점과 다릅니다. 공관복음은 사랑의 “추가” 차원을 강조합니다. 누가는 우리가 모든 사람의 이웃이 되라고 권유합니다. 비록 그들이 원수이거나 사마리아 사람처럼 깨끗하지 않더라도 말입니다(눅 10:29-37). 마태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그리하여야 너희 하늘 아버지의 자녀가 되리라 하나님은 악인과 선인에게 해를 비취시며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비를 내리시느니라”고 요구합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너희에게 무슨 공로가 있으리요? 세리들도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느냐? 그리고 네가 형제들에게만 문안하면 무슨 특별한 일을 하겠느냐? 이방인들도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느냐?” (마 5:44-47); 그리고 바울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나 자신이 아나테마 되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기를 원하노라”(롬 9:3). 반면에 요한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서로 사랑할 것을, 교회의 특징인 사랑을 주장합니다. John의 형제는 Blaz와 Bultmann이 의도한 것처럼 모든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입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요한 15). 이것이 교회 내의 사랑, 즉 “서로 사랑”(요일 13:1; 3:11,23-4; 요이서 7,11:12)이라는 위대한 주제입니다.

신약성경의 마지막 부분에 기록된 요한이 사랑의 외적인 차원보다 교회적인 차원에 더 관심을 두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아마도 요한은 교회 생활이 발전하면서 다른 그리스도인을 사랑하는 것보다 먼 곳을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더 쉬운지를 이해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의 모든 내분, 분열, 분열, 상호 파문, 정당과 파벌, 서로 끊임없이 논쟁을 벌이는 다양한 흐름과 움직임이 이를 충분히 입증했습니다. 때로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우리를 소외시키는 사람들을 용납하는 것보다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우리 자신을 맡기는 것이 더 쉽습니다. 우리에게 부딪치는 민감함으로 기독교를 경험하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보다 멀리 있는 사람을 돕는 것이 더 쉽습니다. 때때로 우리에게 반복음적으로 보일 수 있는 계층 구조와 대화하는 것보다 외부의 억압자를 용서하는 것이 더 쉽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고 하는 사람은 자기가 행하는 대로 행동해야 합니다”(요일 1:2). 즉, 교회는 세상에 강생하신 사랑의 눈에 보이는 표징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 우리에게는 상호 사랑의 힘으로 다른 사람들을 우리에게로 끌어들이는 것 외에는 다른 사명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교회를 설립하고 활력을 주는 하느님 사랑의 믿을 만한 표징이 되기 위해 완전한 일치를 추구하면서 지속적인 분열 극복에 “코이노니아”, 즉 내적 “친교”를 두어야 합니다.

세상에 무신론이 너무 많다면, 그것은 우리의 행동으로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표징을 보여주지 못해서가 아닌지 자문해 봅시다. 우리의 교회 내 관계는 사랑의 깃발 아래 있습니까? 교회에는 항상 개인에 대한 존중, 개인의 자유에 대한 존중이 있습니까? 상호 경청, 수용, 평등, 형제애, 대화, 판단을 삼가는 일이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 가장 큰 소망과 기도는 “모두가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였습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한복음 17:21).

제롬은 고대 전통을 인용하여 이제 나이가 많은 요한이 “서로 사랑해!”라고 말할 수 있는 능력이 더 많아졌다고 말합니다.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구원받은 자에 속하는 유일한 기준입니다. 예배, 신학 적 또는 성경적 지식은 아닙니다. 오직 사랑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기 때문에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사망 안에 머물러 있습니다.”(요일 1:3)

모두에게 행복한 자비를 베푸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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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Spazio Spado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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